05 인물과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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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의 화가, 변박
  • 동래의 화가, 변박

    변박은 동래부 소속의 화원으로, 부산진순절도 및 동래부순절도를 그리고,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도 다녀온다.



    시대 : -

    주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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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박물관에는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소장되어 있다. 1963년 8월 각각 보물 제391호과 보물 제392호로 지정된 변박이 그린 그림이다.  동래부 소속의 화원이던 그는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에서 왜군과 전투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생동감 있게 묘사한 1760년(영조36)대의 기록화이다. 숙종 35년(1709)에도 두 그림이 그려졌으나 현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변박의 그림이 더욱 사료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원래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동래구 안락서원에 봉안되어 있었다. 변박은 1742년(영조18)경, 밀양 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지(成之) 혹은 탁지(琢之), 호는 술재(述齋) 혹은 형재(荊齋)다. 동래지역에서 살면서 동래부에 소속된 무청(武廳)의 최고 직임인 천총․행수․별장 등을 역임하였다.

 1763년(영조39)에는 조엄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으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조엄은 그를 문자에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고 평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동래지역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현존하는 그림으로는 1783년(정조7) 여름에 부산 초량 왜관의 전경을 그린 「왜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으며, 18세기 동래부사가 동래부에 도착하던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를 열 폭의 병풍으로 그린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 일본에도 그의 그림이 현존한다.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린 그림이 「묵죽도(墨竹圖)」와 「송하호도(松下虎圖)」이다. 각기 ‘조선국형재(朝鮮國荊齋)’ 및 ‘성지(成之)’, ‘갑신삼월(甲申三月)’이란 글자와 도장이 찍혀 있다. 다카마쓰시(高松市) 호넨지(法然寺)에 현존하는 「유하마도(柳下馬圖)」는 1779년(정조3) 여름에 동래부에서 그렸다가 이후 일본으로 유입된 작품이다. ‘세기해초하(歲己亥初夏) 동화술재사(東華述齋寫)’와 ‘술재(述齋)’라는 글자와 도장이 찍혀 있다.

 변박은 글씨도 남겼다. 1765년(영조41)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동래부 동헌 앞 정문 현판을 기록으로 남기며 ‘세을유동서(歲乙酉冬書)’라 했다. 변박(卞璞)이란 도장이 남아 있으므로 그가 쓴 날짜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1781년(정조5)에는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의 비문을 쓰며 ‘유학변박서(幼學卞璞書)’라고 분명히 기록해 두었다. 자신의 필적을 남긴 것이다. 당시 동래읍성의 남문 밖에는 네 곳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돌다리로 바꾼다. 그래서 ‘사처석교비’라 했던 것이다. 변박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시즈오카현(靜岡縣) 시미즈시(淸水市)의 세이겐지(淸見寺)에는 그가 지은 한시가 남아 있다. 1764년(영조40) 3월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들렀던 곳이다.

땅은 삼신산의 경계와 접하고

하늘은 만리 바다에 닿아 있는데

절은 원래부터 절경이었건만

객만 잠시 머물다 떠나려 한다네.

시인의 마음은 봄꽃에 있는데

나그네 근심은 석양에 더 많도다

서성임에 오히려 아쉬움만 더하거니

슬퍼한들 더 이상 어찌리

地接三山界 天低萬里波 禪家元勝絶 槎客蹔經過

詩意春花在 羇愁夕照多 徘徊還惜別 惆悵更如何

 「제청견사용전운(題淸見寺用前韻)」이라는 한시이다. 변박은 무임출신이면서 화가, 서예가, 문인이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동래부에서 활동한 화가 변박의 다양한 재능을 새롭게 조명해 볼 만하다. 2011년에는 개관한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부산지하철 4호선 수안역 내)에서도 그의 「동래부순절도」을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