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생활과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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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사람의 먹거리 국수의 역사, 구포국수
  • 부산 사람의 먹거리 국수의 역사, 구포국수

    구포국수는 우리나라에서 지명 자체로 유명 브랜드가 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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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국수는 우리나라에서 지명 자체로 유명 브랜드가 된 최초의 사례이다. 1988년 한 공장에서 구포국수로 독자적인 상표 등록을 하자 주변 공장에서 소송을 걸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물이므로 한 공장에서 단독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부산에서 나오는 국수는 거의 구포국수로 통용되고 있다.

 

나이 든 부산사람 치고 구포 역전에 즐비한 국숫집에서 따뜻한 멸치 육수에 부추, 김, 참깨, 단무지 등과 계란 황백 지단을 채 썰어 넣은 후 적당히 삶은 중면을 말아주는 쫄깃한 구포구수를 한 번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배고팠던 시절에 낙동강 강바람으로 건조한 거북표 구포국수는 부산의 재래시장은 물론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쉽게 한 단씩 사서 집집이 나름대로 국물이나 고명을 넣어 식구대로 둘러앉아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던 서민들의 먹거리였다.

 

우리나라에서 밀 농사를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라고 하지만 쌀과 보리와 같은 주곡은 아니었고 곡물가루로서의 밀가루는 그 희소성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려시대에 와서 밀가루는 주로 전병이나 국수로 만들어 먹었는데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왕족들이나 고관들이고 이들로부터 밀가루를 시주받았던 승려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밀가루가 본격적인 국수 재료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였다. 쇠고기나 은어로 우려내 감칠맛 나는 육수를 만들고 찬물에 헹궈 건진 국수 위에 수육과 채소, 계란 등 갖가지 고명으로 장식을 더했다. 이때도 서민들은 양반가 국수를 흉내 내어 메밀 삶은 국숫물에 푸성귀 몇 잎 얹는 정도의 제물국수를 만들어 먹어 국수 한 그릇에도 신분 질서가 분명한 음식이었다.

 

17세기 무렵 구포는 상주의 낙동진(洛東津), 합천 율지의 밤마리 나루와 더불어 낙동강 3대 나루인 감동진(甘同津)의 소재지였다. 사시사철 명지 염전의 소금을 실은 돛단배가 낙동강을 따라 대구와 안동으로 올라갔고, 가을 녘이면 내려오는 배편으로 실려 온 쌀과 곡물이 구포 나루에 부려졌다.

 

1876년 부산항 개항를 거치면서 구포지역은 구포나루에서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구포역이 들어서면서 사람과 물자가 넘쳐나는 번영을 맞게 된다. 이 시기 구포에는 쌀과 보리 외에 예전에는 취급하지 않던 밀이 대량 반입되었다. 일제강점 시기에 제분‧제면업은 조선인에게는 쉽게 허가되는 사업이 아니었고, 밀가루뿐만 아니라 국수 역시 일반에는 익숙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러다가 지금같이 국수가 흔한 먹거리가 된 계기는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구호용 밀가루가 대량 방출되면서부터였다. 전쟁으로 인한 피난 행렬이 구포에 발을 디딘 후 허기진 피난민들의 사정을 맨 먼저 헤아려 준 것이 국수였다. 간편한 조리로 반찬 없이도 먹을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구포국수는 피난민뿐만 아니라 전쟁에 지친 고달픈 서민들의 중요한 먹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구포국수 면발의 짭짤하고 쫄깃한 특징은 한강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가져온 면을 가늘게 뽑는 기술과 면발 건조과정에서 낙동강 하구로부터 불어오는 염분을 함유한 습기 많은 바람에 의한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1959년 10월 구포에서 성업 중이던 20개의 국수 공장들이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상표 등록을 하여 구포국수 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국수 제면 공장이 30여 곳에 달할 정도로 구포국수는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구포국수의 제조방법의 특징으로는 밀가루, 소금, 물을 혼합해 반죽한다. 면발 제조는 ‘반죽→ 압연(반죽 밀기)→ 절출(면 자르기)→ 건조→ 절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구포연합식품의 경우 쌍롤러 두 쌍이 서로 맞물려 반죽을 눌러 붙이면서 넓고 긴 반죽 띠를 만들면, 일반 롤러 6개가 차례로 압축해 국수 면발을 쫄깃하고 탄력 있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롤러마다 부착된 핸들로 반죽의 강도를 조정하면 굵기가 다른 소면, 중면 등의 국수가 만들어진다. 구포국수 면발의 짭짤하고 쫄깃한 특징은 한강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면을 가늘게 뽑는 기술과 면발을 널어 말리는 과정에서 바다와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염분을 함유한 습기 많은 바람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에 들어오면서 이전 6·25전쟁 기간의 무상 지원이나 전후 혼분식 장려 정책이 사라지고 국수 업계가 사양화되면서 구포국수 공장은 각각 판로를 찾아 부산과 인근 대동이나, 김해, 밀양지역으로 뿔뿔이 떠났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국수가 대량 생산되어 유통되면서, 구포국수는 1990년대 이후부터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구포 일대의 구포국수 공장은 ‘구포연합식품’ 단 한 곳에 불과하다.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은 경상남도 김해시 등지에 두세 곳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포국수의 종류는 두 가지로, 두께가 얇은 ‘소면’은 익는 시간이 짧고 쉽게 불기 때문에 비빔국수나 낙지볶음·골뱅이무침 등 비벼 먹는 요리에 알맞고, 두께가 두꺼워 좀 더 쫄깃한 맛을 내는 ‘중면’은 주로 국물에 말아 먹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