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부친이 운영하던 범일동 정미소가 화재로 소실되자 양정모가 그 자리에 조그만 신발공장을 짓게 되는데 그것이 훗날의 국제고무공업사이고 여기에서 생산된 신발이 그 유명한 왕자표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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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모(梁正模, 1921∼2009)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양태진(粱泰振)은 동래구 안락동에서 출생한 부산 토박이로,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낙민초등학교)를 중퇴하고 행상을 하여 모은 돈으로 쌀가게를 열어, 1938년에 일본인과 같이 정미소를 설립하였다. 해방 직후 정미소를 불하받았고, 훗날 국제화학을 창업하였다. 양정모의 부인은 김명자(金明子)이고, 슬하에 큰아들 양희재(粱熙宰)와 딸 여덟 명을 두었다.
양정모는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 부산공립공업학교[현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1937년 졸업을 한 뒤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식량영단 경상남도지부에서 일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후 그는 장사를 시작하며 아버지의 정미소와 조선목재의 일을 도왔다. 독자적인 사업을 생각하고 있던 양정모는 공업학교 출신답게 제조업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신발공장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1948년 부친이 운영하던 범일동 정미소가 화재로 소실되자 양정모가 그 자리에 조그만 신발공장을 짓게 되는데 그것이 훗날의 국제고무공업사이고 여기에서 생산된 신발이 그 유명한 왕자표 신발이다. 초기 국제화학의 왕자표 신발은 70여 개 신발 기업들이 경쟁하던 부산에서 하루 600켤레에 불과한 생산량에 불량품도 많아 고전했지만, 부산진시장을 중심으로 조금씩 판로를 넓혀 갔다. 1949년 12월 국제고무공업사는 국제화학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꾼 뒤, 6·25전쟁기의 특수(特需)를 누리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1953년과 1960년 두 번의 큰 화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양정모는 대폭 증자(增資)의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하였다.
1962년에는 진양화학을 설립하여 1963년 3월 이복동생인 양규모에게 분리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1968년 잠시 진양화학의 사장을 역임하였지만, 곧 국제화학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9년에는 거대한 신발공장인 국제화학 사상공장에서 생산하는 신발은 전국 생산량의 20%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양정모는 산발의 내수시장 확장은 물론 수출시장도 개척하여 수출 5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급성장하여 왕자표 신발은 신발업계의 왕자로 등극하였다. 국제상사는 세계 최대의 신발 제조업체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1년에는 성창섬유를, 1972년에 국제상선을, 1974년에는 동해투자금융을 설립하는 한편 보국증권과 삼양펄프를 인수했다. 이어서 1976년에 풍국화학과 조광무역, 1977년에는 연합철강과 그 계열사를 모두 인수하였다. 1976년 국제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1977년 창업 30주년을 맞았는데, 이때 왕자표 신발은 명실공히 업계의 왕자 자리에 올랐고, 국제상사는 단일 신발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다.
양정모의 사업은 이후에도 동서증권, 동우산업, 원풍산업, 국제종합건설, 국제종합기계, 국제종합기술개발 등을 편입시켜 21개 계열사, 3만 8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막강한 기업 집단을 이루면서 그는 1980년 국제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국제상사는 주력 기업 대부분의 본사를 부산에 둔 전형적인 향토 재벌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양정모는 9·10·11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연임하며, 1976~1985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과 1981~198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1985년 2월 13일 국제그룹은 갑작스레 채권 은행단의 자금 관리에 들어갔다가, 5월 21일 전격 해체되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그룹 해체의 원인이 자체 브랜드 개발에 실패하고, 용산 신축 사업으로 인한 자금난, 전근대적인 기업 경영형태,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건설업 적자 등 부실에 있다고 발표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기업 길들이기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이후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에, 국제상사 등 나머지 계열사와 사옥은 한일그룹으로 넘어갔다.
1985년 당시 양정모 회장은 모기업 국제상사를 비롯하여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인 막강한 기업집단의 총수였으며, 그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연임하며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있으면서도 고집스레 그룹의 본사를 부산에 두고 있었다. 양정모는 와신상담 끝에 1987년 국제그룹복원본부를 발족시켜 국제그룹 되찾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7년여의 지리 한 싸움 끝에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로부터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하지만 1994년 한일합섬을 상대로 제기한 주식인도청구소송에서 1996년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패소하여 한일그룹을 상대로 기업을 돌려받는 데 실패하였다. 정부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사실이나, 이로 인해 개인 간의 계약까지 무효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0~80년대 중반 한국 신발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토박이 기업가 양정모는 재기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비운의 경영인이라는 한을 남긴 채 2009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났다.